문제 : 인간은 ○○에서 태어나서 ○○에서 죽는다.

정답은 뭘까. 엄마의 배? 태어나는 곳은 맞지만 죽는 데는 아니다. 그러면 자연? 크게 보면 오답은 아니지만 뭔가 부족하다. 정답은 병원이다. 재작년 신생아 48만여 명의 98.3%가 병원에서 태어났다. 사망자의 72%(2011)가 병원(이송 중 포함)에서 숨졌다. 생명의 탄생과 소멸이 의료행위가 됐고,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무대가 병원으로 바뀌었다.

태어나서 자란 곳을 고향이라고 한다면 병원과 산후조리원을 그리 불러도 완전 억지는 아닐 테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병원 출산이 영아사망률을 선진국 수준으로 낮춘 거다. 그러면 병원 사망은 우리네 삶을 얼마나 이롭게 했을까. 편의성 증진이라고 하면 죽음 모독일 테고,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다. 40여 년 전의 기억. 어릴 때 어머니를 따라 외조부상에 갔다. 병풍 뒤에 안치된 외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그리 놀라지 않았다. 자연스레 죽음을 배웠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상이 나면 동네 사람들이 다 나섰다. 아이들도 만장(輓章)을 들었다. 일종의 동네 축제였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집에서 죽는 걸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당시 병원 사망이 15%가 채 안 됐다.

지난해 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이 가족에게 둘러싸여 집에서 평온하게 숨졌다. 서글프게도 재택(在宅) 임종은 우리에게 낯선 풍경이 됐다. 독일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100여 년 전 “지금은 559개의 침대에서 사람들이 숨을 거둔다. 이것은 죽음의 대량 생산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병원 임종을 탄식했는데, 그게 우리 현실이 됐다. 몇 달간 병원에만 있다 생을 마감하면 가족과 제대로 이별도 못한다. 어린 자녀와는 분리돼 버린다. 그야말로 객사(客死)다. 집에서 말기를 보내던 환자도 임종 직전 응급실로 실려간다. 의료진에 둘러싸여 곧바로 숨진다. 인공호흡이나 심폐소생술은 필수다. 심신이 극도로 쇠약해진 사람에게 가해지는 그 고통,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다.

아무리 비루해도 생의 마지막을 보내기는 안방만 한 데가 없다. 치매를 앓던 85세 김 할머니는 병세가 급속도로 악화돼 임종 전 두 주 전부터 물만 마셨다. 그래도 자녀들은 요양병원 대신 집을 택했다. 평생을 살던 집이 낫다고 판단했다. 마지막에는 자식들이 모두 곁을 지켰다. 장남은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편안해 보였고 우리들도 마음이 편했다”고 말한다. 한 말기암 환자는 병상에서 집 꿈을 꿨다. 딸이 만들어준 리본 공예품, 손수 돌을 쌓고 흙을 날랐던 정원, 손때 묻은 가재도구, 어린 딸과 아들…. 잠시 귀가해서 집 구석구석을 가슴에 담고 떠났다. 웃음을 보이기도 했다. 다른 환자는 뒤뜰의 고구마, 감나무에 열린 감을 그리워하다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

700명이 넘게 말기 환자를 임종한 일본 의사 나가오 가즈히로(나가오 클리닉 원장)는 재택 임종을 권한다. 병원에서 집으로 오기만 해도 아픔이 줄거나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고 우울증이 개선된다. 병원에 있으면 ‘환자’지만 집으로 오는 순간 ‘아버지(어머니)’가 된다. 가족의 일원으로 복귀한다. 재택 임종을 후회하는 가족을 한 명도 본 적이 없다(『의료부정서적에 살해당하지 않기 위한 48가지 진실』, 북&월드). 일본의 다른 연구에서도 재택 임종한 말기 암환자 가족의 90%가 “환자의 몸과 마음이 안정적이었다”고 답했다.

재택 의료를 지원하는 의료기관을 만들어 의사와 가정간호전문 간호사가 환자를 찾아가면 재택 임종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24시간 전화 상담, 긴급 왕진 서비스가 있으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지금 의료 체계에서는 이런 게 불가능하다. 가정호스피스도 몇 군데 안 된다. 미국·영국·일본 등의 선진국은 이미 병원 임종에서 재택 임종으로 방향을 틀었다. 예부터 장수·부 등과 함께 고종명(考終命)을 오복(五福)의 하나로 친다. 이는 죽음을 깨끗이 하자는 것으로 객지가 아닌 집에서 편히 생을 마치는 것을 말한다. 병원 사망이 더 늘다가는 죽음의 질마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권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신성식 논설위원 겸 복지선임기자